일년에 드라마를 기껏해야 몇 편 보지 않는 내가 '드라마의 제왕'이라는 드라마를 처음부터 본 이유는 오직 주연배우가 김명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에 비해 '앤서니킴'이라는 캐릭터가 김명민에게 다소 어울리지 않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김명민은 '앤서니킴'이라는 배역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빠른 속도로 실명되어가는 자신의 눈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자기가 맡은 일을 책임지는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김명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명민의 연기력은 역시나 두말할 것 없었지만, 이 드라마는 단순히 김명민의 연기력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재미가 있는 드라마였다.
우선 이 드라마는 유쾌한 드라마였다. 나는 유쾌한 드라마가 좋다. 극중 대사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애초에 드라마라는 장르는 '예술'의 영역이 아니다. 간혹 드라마를 보다보면 거대한 스케일과 진지하고 스릴 넘치는 내용들로 초반부에 흥미를 자극하며 드라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들을 하지만, 막상 후반부에 가서는 질질 끌거나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 드라마들이 많았다. 반대로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스케일과 진지함을 버리고 유쾌함으로 승부를 했고, 이것이 오히려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심리를 낮추며 끝까지 보게 하는 재미를 가져다 주었다.
이 드라마를 대충 보거나 중간중간 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삼류 드라마'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요소가 있다. 특히 초반부에는 가벼운 내용으로 빠른 전개를 하면서 매 회 사건이 하나씩 터지고, 그 사건은 그 회에 바로 해결된다. 막장드라마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장면이 이 드라마에는 매 회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막장 요소'들을 너무 질질 끌지 않아서 좋았다. 또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막장 요소'들은 자세히 보면 메인 스토리가 아니라 부조리한 드라마 제작 현실과 기존 막장드라마들에 대한 해학과 풍자를 위한 장치임을 알 수 있다.
후반부에 내용이 갑작스레 진지해지며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드라마의 마무리 역시 유쾌했다. 특히 김명민(앤서니 킴)이 죽었다가 정려원(이고은)의 눈물어린 호소에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장면은, 이 장면만 놓고 본다면, 역대 최강의 막장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드라마를 봤다면 이 부분 쯤은 웃으면서 넘길 수 있다. 처음부터 이 드라마는 '하나도 진지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왔기 때문이다.
매 회 드라마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소제목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책에도 책의 제목과는 별도로 챕터마다 소제목이 붙는 책이 있는데, 이를 드라마에서 시도해본 듯하다. 매 회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인 이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장치였다. 특히 마지막 회의 소제목이었던 '제왕의 최후 혹은 최후의 제왕'이란 문구에서는 작가의 센스가 엿보인다.
또한 기존에 드라마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는 배우나 감독의 이야기를 했던 반면, 이 드라마는 배우나 감독 뿐 아니라 제작자, 작가, 스텝 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드라마 제작 현실을 좀 더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드라마는 예술이 아니라 '노가다'에 가깝다는 현실을 정확히 보여주면서도, 그런 일에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비록 쪽잠에 쪽대본에 삼류 같은 생활을 버텨야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1분 1초가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기억할 수 있게 할꺼야."
(극중 대사)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수확 중에 하나는 '배우 최시원'의 발견이다. 많은 아이돌 배우들이 드라마에 투입되어 어설프게 주연 급의 연기를 하거나 비중 없는 조연을 연기하는 데 비해 최시원의 등장은 역대 아이돌의 연기 데뷔 중 단연 돋보인다. 주인공인 김명민과 정려원을 제외하고 가장 비중있는 조연 역할인 '강현민'이라는 무식하고 찌질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이를 정말 훌륭하게 소화했다. 실제 최시원도 이런 캐릭터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중에는 최시원 얼굴만 화면에 나와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아이돌이 멋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찌질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서 최시원이 연기자로서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였다.
비록 시청률이 한 자리 수를 벗어나지 못했고 방영 중이었던 탓에 연말 시상식에서도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내가 뽑은 2012 드라마의 제왕은 '드라마의 제왕'이다.
'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후기] - Too old hiphop kid (1편) (4) | 2013.01.14 |
---|---|
[레미제라블] - 악역이 없는 영화 (0) | 2013.01.10 |
B급 언론이 C급 악플러를 만든다 (0) | 2013.01.07 |
연예사병과 상무를 없애야 한다. (2) | 2013.01.03 |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2) | 2012.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