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인간의 조건] 장수할 수 있을까?

작년 말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이 나왔다. 방영 전부터 이 프로그램은 큰 기대를 갖게 했다. 1박 2일 시즌1을 연출한 나영석 PD의 복귀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 가장 '핫'한 개콘 개그맨들이 메인으로 출연하는 최초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콘 개그맨들은 그동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희귀 아이템'인지라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즉, 멤버 구성 만으로도 반 이상 먹고 들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은 실망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조건들을 '제거'해서 체험해본다는 컨셉은 좋았지만, 첫 주제가 '휴대전화, 인터넷, TV 없이 살기'였던 점이 아쉬웠다. 이건 너무 뻔하고, 식상했다. PD 지망생들끼리 기획안 스터디를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오던 기획이었다. 물론 실제 방송으로 만들기까지의 '디테일'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프로그램의 흐름이나 내용도 '휴대전화 없이 사니 사람이 더 소중해진다는' 너무나 예상 가능하고 뻔한 흐름을 보였다. 한마디로 실망했고, 1회만 보고 더이상 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지난 주에 '인간의 조건'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그 사이 나영석 PD는 KBS를 떠났다. 그런데 프로그램은 더욱 탄탄해져서 돌아왔다. 파일럿 때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신선한 아이템과 탄탄해진 기획력이다. 멤버들은 이번 미션 주제를 예측하면서 '차 없는 일주일', '인스턴트 없는 일주일' 등을 예상했다. 하지만 미션은 '쓰레기 없는 일주일'이었다. 오, 이건 좀 신선했다. 디테일도 좋았고, 유익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배출하는 쓰레기 문제가 심각한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막상 실천은 어렵다. 내가 많이 안 버려도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버릴 테니까? 처음엔 나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에서는 그게 아니었다는 점을 짚어준다. 우리가 쓰레기를 줄이지 못하는 이유는 귀찮기 때문이다. 장바구니를 사용하기 귀찮아서 비닐봉지를 사용하고, 손수건을 들고 다니기 불편하니 휴지를 사용한다. 멤버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집에서 지렁이를 키우고,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길거리에서 파는 떡볶이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가고, 커피숍 커피를 개인 컵에 받아가려는 노력들을 한다. 내가 조금만 더 불편하고, 조금만 더 수고하면 충분히 쓰레기를 줄일 수 있고 지구는 더 아름다워진다. 보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꽤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이 주제를 바로 공개하지 않고 일단 하루 동안은 마음대로 생활하라고 한 '디테일'도 돋보였다. 실제 개그맨들을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그들이 남긴 음식물과 쓰레기를 수거해서 직접 보여주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을 버리며 살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단순히 자막으로 '우리는 하루 평균 XXkg의 쓰레기를 버리고 산다'고만 보여주고 바로 미션을 발표했으면 충분히 공감하기 어려웠을 테다.

 

시작은 좋았지만 이 프로그램이 가진 한계도 있다. '착한 예능'도 아닌 '유익한 예능', '계몽적 예능'을 지향한다는 점은 자극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시청자의 눈을 계속해서 사로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신선한 주제들을 생산해내는 일 역시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현재 개콘을 이끌어 가는 '개그맨 6인방'의 힘과 제작진의 기획력이 빛을 발한다면 장수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