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산 중턱에 있었다. 담벼락 밑으로 만들어 놓은 인도를 쭉 따라서 올라가야 학교 정문이 나왔는데, 그 때는 그 길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다. 정문을 바라보면 너무 멀게만 보여서 나는 항상 고개를 돌려 담벼락을 쳐다보며 등교하곤 했다.
국민학교(당시에는) 1학년이었던 1992년 겨울이었다. 종종 아이들의 낙서만이 눈에 띠었던 담벼락에 말끔한 양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았던 대선이라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기호 1번 김영삼>
<기호 2번 김대중>
<기호 3번 정주영>
대통령이 되려면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해야 하고 엄청 훌륭해야 한다고 들었기에 어린 나의 눈에는 사진 속 후보들의 모습에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선생님이 그 분들 얼굴에 낙서를 하면 경찰에 잡혀간다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었다. 어린 나이에는 정말 대단하고 엄청난 존재였던 많은 어른들이 사실은 하나의 나약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아온 정치인들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더 나약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승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동료를 배신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갖은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고, 반성하지 않았다. 나라의 일을 논의하는 회의장에서 주먹질을 하고 최루탄을 터뜨렸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도 오뚝이처럼 일어서 당선되기도 했다. 일부 소신 있는 정치인들은 이 더러운 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나는 더이상 그들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내가 예전에 썼던 글에서도 정치인을 마술사, 약장수, 점쟁이와 더불어 '거짓말로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정치판에 안철수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50%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고, 재산의 50%를 사회에 기부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지적대로 정치경험이 전무하고 정치적(세력) 기반이 취약한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찍고 오는 게 아니라 정말 찍고 싶은 후보가 생긴 건 처음이었다.
안철수가 이미 사퇴를 선언한 마당에, 그가 여전히 최고의 대통령후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이번 단일화 TV 토론에서 안철수는 원칙에만 충실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세간의 표현대로 정치 경험이 없고, 자질이 부족하다거나, 박근혜도 할 수 있는 말을 했다는 점을 전면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정치인이 어떤 말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이 지켜질 수 있는지가 진짜 중요한 거다. 안철수는 이번에 후보직 사퇴를 통해 대통령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가 TV 토론에서 밝힌 자신의 철학과 목표가 실현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자신이 단일화 후보가 되어야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는 자료가 있는 상황임에도, 국민과의 약속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단일화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대선승리가 목적이다."
"정치의 힘은 권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안철수는 문재인과의 단일화 TV 토론에서 이렇게 말했고, 결국 오늘 첫번째 말을 실천했다. 그가 두번째 말대로 정치의 힘을 갖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20년 만에 정치인에게서 '아우라'를 느꼈다. 그 이유는 그때와 확실히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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