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전쟁이다. 총 대신 '룰'이 존재하는 전쟁. 경기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선수들은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스포츠 관련 보도에 ‘격침’, ‘탈환’, ‘졸전’ 등의 전쟁에서 유래한 어휘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양대학교 시절 선배들에게 무식하게 공만 빠르다는 핀잔을 듣던 박찬호는 1994년 ‘메이저리그’라는 꿈의 무대를 밟는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라는 전쟁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2년 동안 그의 기록은 4경기 8이닝 투구가 고작이었다. 마늘 냄새가 난다며 팀에서 따돌림도 받았다. 역시 한국인에게 메이저리그는 무리였을까. 하지만 1996년부터 조금씩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었다. 특히 2000년에는 무려 18승을 거두며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성공에 따르는 개인적인 명예나 돈이 그의 성공요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IMF라는 국가적 위기에 빠져 상실감을 느끼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박찬호는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우리나라를 대표해 세계적인 야구선수들과 맞서 싸웠다.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경기 중 인종차별 발언을 한 선수에게는 우리 모두를 대표해 ‘날라차기’를 하며 징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이후 박찬호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악의 FA 사례’ 상위권에 랭크되며 ‘먹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그의 선발등판을 중계해주던 방송사에서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에서도 등판 숫자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불펜투수로 전락한 투수의 경기를 중계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봐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에도 박찬호는 멈추지 않았다. 비록 전투력을 잃은 평범한 병사로 전락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싸웠다. 그리고 드디어 2010년에 통산 124승을 달성했다. 일본인 투수 노모의 123승을 뛰어넘으며,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아시아인 최다승’을 기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박찬호를 ‘코리안특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모습은 겨우 5년에 불과했다. 나는 박찬호에게는 ‘코리안특급’이라는 표현보다 ‘전쟁영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유니폼은 7번이나 바뀌었지만, 그가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는 항상 태극기가 붙어있었다. 잘 싸우기도 했지만 때론 얻어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계속해서 싸웠고 메이저리그 아시아 최다승이라는 고지에 기어코 태극기를 꽂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전쟁영웅의 최후의 승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124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후,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 한 시즌씩을 뛰었다. 그를 응원하는 팬들에 기대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모든 이에게 영웅으로 기억될 자격이 있다. 전성기 때의 김병현이 구위는 더 나았다느니, 선동렬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으면 더 잘 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의미가 없다. 박찬호는 실제 메이저리그를 개척하고 진정한 ‘홈구장’ 하나 없었던 미국에서 홀로 17년을 싸웠다. 그가 없었다면 합당한 몸값으로 미국에 진출한 류현진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전쟁터를 떠나는 전쟁영웅에게 잠시나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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