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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준비되지 않았지만 어색하지 않은

이 글은 2011년 6월 20일 싸이월드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일부 수정)

 

1981년 미국에서 MTV라는 채널이 등장했다. 이 채널은 음악만을 위한 채널로서, 하루 종일 뮤직비디오가 방영되는 채널이었다. MTV는 사람들에게 대중음악이 단순히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면서 듣는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MTV에서 처음으로 보여준 뮤직비디오는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이는 아주 상징적인 예언이었고, 예언은 현실이 됐다. 눈을 감고도 음악감상이 가능했던 라디오와는 달리, TV에서 나오는 뮤직비디오는 대중들로 하여금 그 화려한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대중들의 '눈'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일부 'radio star'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 중 하나가 바로 1990~200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계였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대중들의 '눈'은 단순히 화려한 퍼포먼스만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는 댄스가수건, 가만히 서서 노래를 하는 발라드가수건 기본적인 '얼굴'이 되어야 '대중의 눈'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가수가 되려 성형을 해야 했고, 무대에 서려 화장을 해야 했다.

 

헌데, 성형을 하고 화장을 해도 답이 안나오는 가수가 있었다. 굳이 '가수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더라도 이 가수가 노래를 정말 잘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학교 때 '하루'라는 노래를 듣는 순간 바로 깨달았다. 아, 이 가수는 노래를 진짜 잘 하는구나. 음악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내가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앨범판매로 한창 잘 나가던 이 가수는, 첫 방송출연과 동시에 앨범 판매량이 급감하게 된다. 환상적인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을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오디오 가수'가 되자" 라는 제작자의 말과 함께 사실상 방송출연이 '금지'되었다. 얼마 후 발매된 2집 앨범 자켓에는 대역이 대신 찍은 사진이 들어갔다.

 

수많은 히트곡을 낸 가수라고 하기 무색하게도, '나가수'에 출연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고작 12번의 방송 출연을 했다고 한다. 김범수 자신도 아마 TV 출연이라든지, 노래가 아닌 '가수 김범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아예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11년, 그러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2011년 상반기에 가장 큰 이슈가 된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첫 회에서 "가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에게 가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과연 정석대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좋은 가수인가에 대해서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도 김범수가 가수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분명히 가수는 노래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선호를 떠나 그 목적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진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은 음식을 썰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잘 썰리는 칼이 진짜 좋은 칼이며, 축구선수는 축구를 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진짜 좋은 선수이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진짜 좋은 가수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범수는 '진짜중의 진짜'였다. 물론 대부분 이미 김범수의 노래를 알고는 있었지만, 좋은 가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보기 전까지는 섣불리 김범수가 진짜 '좋은 가수'라고 판단하기 힘들었다.

 

TV에서 김범수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확실히 깨달았다. 역시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는 점을. 김범수는 '제발'과 '늪'으로 가창력의 진수를 보여주더니, '님과 함께'를 통해 '국민 비주얼 가수'에 등극했다. 사람들은 십여 년 전에 자체적으로 방송출연이 금지되었던 얼굴을 보며 잘생겼다고 환호한다. 이는 비꼬거나 놀리는 게 아니다. 단순히 웃자고 하는 소리도 아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했을 김범수에 대한 격려이자, 한동안 가수의 필수조건으로 여겨지던 '외모 결정론'에 대한 풍자이다.

 

 

김범수에게는 흔히 '잘나가는' 사람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안티'도 찾아보기 힘들다. 김범수가 지금에서야 누리는 관심과 사랑이 과분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일 테다. 사람들의 "잘생겼다~"라는 환호에 '이상한 포즈'를 취하는 김범수의 모습을 보면, 김범수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는 가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있는 김범수의 모습이 결코 어색해 보이지는 않는다. 가수로서 잘 되어야 하는 사람, 진짜중의 진짜이기 때문이다.

 

'radio star' 김범수를 죽였던 'video(TV)'가 그를 다시 살렸다. MTV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Buggles'의 저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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