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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엔딩노트] 죽는다는 건 슬픈 일인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죽음을 피해갔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용감한 사람이든, 겁이 많은 사람이든, 혹은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은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무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때로는 치사하고 비겁해지기까지 한다.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세상이 무너진 것 마냥 오열을 하고, 지인들도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이는 아마도 사람들이 죽음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영화 '엔딩노트'는 한 남자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딱히 연출에 대한 고뇌가 담겨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주인공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을 뿐이다. 지극히 사적일 수 있는 이 내용이 영화로써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접근이 보통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암에 걸려 더이상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주인공은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포자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뿐이다. 마치 초등학생이 여름방학 계획을 세우듯, 죽기 전에 꼭 해야할 일을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기록이 바로 엔딩노트다. 평생 가본 적 없는 성당에 가보고, 세례도 받고, 그 성당에서의 장례식을 계획한다. 손녀들과 원없이 놀아주고, 가족여행도 떠난다. 그리고 장례식 장소와 명단을 스스로 작성하며 삶을 정리해 나간다. 주인공은 영화에서 단 한번도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고,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을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 영화였다. 또한 '죽음'이라는 게 단지 '삶'이라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 뿐이라는 사실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주인공이 죽음을 부정하고 삶에 대한 의욕과 집착을 보였으면 조금 더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왜 죽을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거나, 끝까지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지 않던가. 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삶에 대한 희박한 희망의 끈을 잡고 살다가 아무 준비 없이 죽는 것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잘 준비해서 죽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며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우리 아빠였다. 아빠 역시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바로 며칠 전에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가 이제 오래 못살 것 같구나. 의사 말로는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는데, 더 빨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일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보면 죽는다는 게 꼭 슬프거나 안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런데 너희 엄마는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 같다. 어떻게든 나를 살려보겠다고 하는데, 내가 죽으면 더욱 슬퍼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니 너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렴. 너라도 의젓하게 행동하고, 엄마를 잘 부탁한다."

 

아빠는 이 말을 남기고 같은 주 일요일에 정말로 눈을 감으셨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죽음 중 가장 '담담'했고, 또 '당당'했던 죽음이었다.

 

 

'어떻게 사느냐' 만큼 중요한 게 '어떻게 죽느냐'인 것 같다. 나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내 죽음을 잘(또는 획기적으로) 준비해보고 싶다. 서른도 채 안된! 앞날이 창창한! 아직 살 날이 더 많은! 꽃다운 이십대 청춘인! 내가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뭐 그냥 그렇다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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