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정글의 법칙]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처음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가 나왔을 때의 첫느낌은 놀라움이었다. '어떻게 예능을 저렇게 만들 수 있지?' 최근 예능과 다큐가 조합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가장 먼저 나서고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SBS의 역작이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정글의 법칙은 애초에 예능을 벗어날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 중 김병만을 제외하면 정글에서 절대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다큐에 버금가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는가. 정글의 법칙은 예능과 다큐가 조합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다큐같은 예능'이었을 뿐이다. 온전한 의미의 '리얼리티' 프로가 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결론적으로 정글의 법칙은 기획부터 애초에 '예능'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는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반면 시청자들이 정글의 법칙을 사랑했던 이유는 '예능인데 예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출연진들이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생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열광했다. 만약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이 정글에 가서 촬영을 한다면 굳이 출연자들을 고생시킬 필요도 없고, 오히려 출연진이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면 시청자들은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제작진을 비난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글의 법칙은 달랐다. 정말로 출연자들에게 음식도 주지 않고, 어려운 환경에 떨어뜨려 놓아야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청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제작진은 프로그램 초기부터 '방송 사상 최초로 시도하는' '정말 긴박하고 극한 상황' 등의 표현으로 정글의 법칙의 정체성을 포장해나갔다. 단추는 이때부터 잘못 끼워졌던 것이다.

 

회를 거듭할 수록 정글의 법칙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높아지자 제작진은 이러한 포장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마존 편 초반에 고작 3000m 정도 높이에서의 고산증세를 마치 심각한 위험 상황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나(5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가봤지만 수많은 사람 중 그정도로 심각한 정도의 증세를 겪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원래 벌에 쏘이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김병만이 콩가개미에 물려 알레르기가 발생한 상황을 마치 '아마존의 위협'이라고 과장할 때부터 고개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얼마 후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사실 제작진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이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상황을 긴박한 것처럼 꾸미고 출연자들의 노력과 고생을 약간 포장하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작진 입장에서 편집 과정에서의 약간의 과장은 시청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노력이었지, 조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고생하며 촬영했다는 진정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고생을 포장하는 과정에서의 진실성이 문제였다. 시청자들이 진정으로 바란 건 보다 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생존하는 모습을 꾸밈없는 화면으로 시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흥미진진한 그림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지만, 그 욕심이 조금 과했다.

 

결국 이 사건은 처음부터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예능'을 만들고자 했던 제작진의 의도와 '예능이 아닌 예능' 을 시청하고 싶었던 시청자에 기대가 엇갈리면서 시작된 비극이었다. 이 사건은 프로그램을 얼마나 잘 만드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시청자에게 이 프로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분명하게 설명시키는 일이 먼저라는 교훈을 준다. 또한 앞으로 나올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실제상황과 연출 사이에서 유지해야 할 진정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에서 연출이 과해지면 이는 분명히 '조작'이 될 수 있다.   

 

 

 

 

 

 

'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출구의 선택  (4) 2015.07.18
[엔딩노트] 죽는다는 건 슬픈 일인가?  (0) 2013.02.12
런닝맨, 무도 추격자  (0) 2013.02.07
[7번방의 선물] 잘못한 영화  (31) 2013.02.05
[인간의 조건] 장수할 수 있을까?  (0) 2013.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