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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청개구리

지난 2주 동안 강화도에 있는 산마을 고등학교에서 지냈다. 비록 산 속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였지만, 한창 좋을 나이에 또래 친구들과 즐겁게 생활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는 그곳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학교 내의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주었다. 주로 교내 목공소에서 목수님과 침대, 책꽃이, 신발장 등을 만드는 일을 했다.

 

 

하루는 아이들 교실에 신발장을 설치해주러 갔다. 닫힌 교실 문의 조그마한 틈 사이로 선생님이 수업 하시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싸이의 말춤도 문화적으로....."

"익명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도 모르게 창문으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훔쳐봤다. 아이들은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부럽다. 나도 이런 수업 들어보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낯선 감정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는 단 한번도 적극적인 학생이었던 적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과 재수, 삼수 시절을 제외하면 제대로 공부해본 기억도 없다. 그렇다고 공부 외 활동에 특별히 적극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수업시간에는 잠만 자다가 점심시간만 되면 가장 먼저 뛰쳐나갔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술담배는 열심히 했다. 산마을고등학교 못지 않은 좋은 고등학교에 다녔음에도, 그때는 그게 좋은 줄 몰라서 밖으로 맴돌기만 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장 짜리 레포트를 다섯 줄만 써서 제출하고 나가 놀았다. 시험기간에 도서관이 아닌 술집에서 밤을 세고 시험을 보러 갔다. 학교를 오래 다니기 싫어서 '학점세탁'도 하지 않고 '깡으로' 졸업했다. 그렇게 20년 만에 학생이 아닌 꿈에 그리던 '일반인'이 된 지금, 이제와서 공부가 하고 싶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찬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와 시간이 있다. 서른 살이 다 되어서 고등학교에 새로 입학할 수도 없고, 대학에 입학해 새내기 흉내를 낼 수도 없다.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지금 와서 할 수는 없다. 이 시간의 공백은 나에게 '결핍'이 되어 남을 것이다. 후회는 되지만 어쨌든 내가 선택한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공부는 조금 다르다. 사고로 죽지 않는 한 100살까지 산다는 이 시대에 어차피 공부는 평생 해야 한다. 아저씨, 아주머니도 수능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노인대학에서 한글을 배우며 검정고시를 준비하신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리 늦은 편도 아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결핍을 채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면 생각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더욱 치열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부하라고 할 때에는 하지 않더니 이제 공부하라는 사람이 없으니 공부가 하고 싶다니. 그렇게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 있었던 시절에는 놀다가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나이가 되서야 공부도 시작해 보겠다니. 허허허. 나는 지독한 청개구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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