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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오늘 마셨던 소주의 가르침

누가 뭐래도 나는 술을 좋아한다. 이 사실은 내가 꽤나 어렸을 때부터 변함이 없다. 술에 대한 철학도 남다르다. 취할 때까지 마지시 않을 바에는 애초에 술을 먹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날이 밝기 전까지, 혹은 필름이 끊기거나 술자리에서 잠이 들 때까지 술을 마시곤 했다.

 

예전에는 정말 많은 시간을 술을 마시는 데 투자했지만, 요즘은 '간혹'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 자주 만나 술을 마시는 친구들도 있지만, 서른 즈음이 된 친구들 중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는 드물다. 각자의 삶이 예전보다는 훨씬 바빠졌기 때문이다. 1~2달에 한번 만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친구들은 이야기한다. 저번에 너희(너)랑 술 마신 이후에 처음 마시는 술이라고. 나는 놀란다. 아, 진짜? 나는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술을 마셨는데... 그리고는 생각한다. 그래 각자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난 원래 너보다는 술 마시며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으니까. 왜 기분이 좋을까? 별 볼일 없이 끝난 오늘 하루를 잠시나마 -혹은 영원히- 잊을 수 있으니까.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게는 일주일이 6일이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술만 먹으면 필름이 끊겼고, 술을 자주 마시기 때문에, 필름이 끊겨있던 시간을 제외하고 기억나는 시간은 일주일에 6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철저한 '문과 스타일'이다. 일상에서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수능을 공부할 때는 한때 수학이 재밌었던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수학 책 안에서의 '수학적 사고'가 재밌었기 때문이었지, 수학적 사고 따위는 수학 문제 이외의 삶에서 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내가 술을 마시는 행위와 수학적 사고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별 볼일 없는 오늘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별 볼일 없는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 있어서 (-1)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1)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술을 마신 날의 하루는 (-1)+(+1)=(0). 즉, 지나고 보면 '그저그런' 하루다. 문제는 다음날 발생한다. 분명 전날의 (-1)은 술을 통해 상쇄했지만, 전날 마신 술로 인해 다음 날 역시 별 볼일 없는 (-1)의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경우, 이틀 동안의 내 삶은 무조건 (0)+(-1)=(-1)이 된다.

 

만약 오늘 별 볼일 없는 하루(-1)를 보내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물론 다음 날에 내가 (+1)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대신 그날을 반성하는 마음으로(그날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내일을 맞이한다면, 술을 마신 다음날처럼 숙취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1)의 삶을 살 가능성은 훨씬 적어지지 않을까? (-1)의 삶을 살지만 않는다면, 이틀을 합산했을 때 (-1)+(0)=(-1), 혹은 (-1)+(+1)=(0). 즉, 적어도 술을 마셨을 경우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술은 언제 마시는 게 좋을까? 오늘 하루를 보람차게 살았다면 그 날은 나에게 (+1)의 하루다. 나는 술을 마시는 행위가 (+1)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람찬 하루를 보낸 날 술을 마시게 될 경우, 나에게 있어 그 하루는 (+2)의 삶이 된다. 비록 다음 날 숙취 때문에 (-1)의 하루를 산다고 해도, 이틀을 합산한 결과는 (+2)+(-1)=(+1)이 된다.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낸 다음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보다 확실히 더 나은 결과다.

 

앞으로는 나에 대한 관리가 필요할 것 같다. 술을 단순히 허무하게 끝나버린 오늘 하루를 잊기 위한 '자위'의 도구로 사용하기보다는, 보람찬 오늘를 보낸 나에게 내리는 '보상'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술과 나는 'win-win'하며 공존할 수 있다.

 

이틀을 (-1)과 같은 시간으로 끝내느냐, (0)과 같은 시간으로 끝내느냐, 아니면 (+1)과 같은 시간으로 끝내느냐는 내 의지에 달렸다. 이렇게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만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오늘 마신 '소주'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